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3/31 [17:21]
드라마 ‘왕과나’에서의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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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주간시흥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중에 ‘왕 과 나’를 보면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고 있는데 그가 폭군으로 알려진 데에는 사약을 받고 죽은 친모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친모에 대한 복수는 핑계이고 그 이면에 숨은 내용은 강력한 왕권을 이룩하려는 속셈에서이다.
이는 조선 개국을 주도한 정도전의 사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정도전이 주장하는 왕이라는 존재는 혈연에 의해서 왕이 되기에 왕은 그저 현재의 입헌군주국가에서의 왕처럼 상징적인 존재면 되는 것이고 실직적인 통치는 관료들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은 혈연에 의해 정해지기에 똑똑한 왕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험을 통해 임명되는 관료들은 유능한 인재들을 항상 충원할 수 있기에 통치의 중심은 재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반기를 들은 것은 태종 이방원으로 목숨을 걸고 정권을 세웠더니 허수아비 왕 노릇만 하라는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거쳐 왕권을 수립한 것이다.
태종이 죽고 위대한 세종대왕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신하들과의 격렬한 논쟁은 피할 수가 없어 왕을 피곤하게 했다.
그래도 세종대왕은 이를 슬기롭게 잘 해결해나갔지만 그 뒤를 이은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다시 재상들이 정권을 잡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할아버지 태종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를 잘 아는 수양대군으로서는 대신들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쿠테타를 감행하여 왕권을 다시 쟁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된 뒤 세자로 임명된 장(후일 덕종으로 추존)이 왕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예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1년 만에 5살인 원자만을 남기고 죽자 덕종의 부인인 인수대비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사돈인 한명회와 결탁해 다시 재상우위의 정치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왕위계승 서열을 보면 첫 번째는 5살인 예종의 원자였고, 둘째로는 덕종의 첫째 아들인 월산대군이었으며, 세 번째가 덕종의 둘째아들인 자산대군(성종)이었다.
 정치적 욕망이 강한 인수대비는 나이가 많은 월산대군보다는 당대의 정치가인 한명회의 사위로 정치적인 안정을 꾀할 수도 있고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성종을 택했다.
자산군이 즉위하여 성종이 되었으나 한명회의 딸인 왕비 한씨부인이 일찍 죽어 후궁으로 있던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가 폐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성종은 자신이 왕위 계승서열에서 세 번째에 불과했지만 당대 거물인 한명회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왕이 되었기에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연산군은 즉위한 뒤에 생모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폭정에 가까운 정치를 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 결국은 반정세력들에게 실각하여 강화도에서 유배생활 중에 쓸쓸히 죽어야만 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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